내가 12년 전에 간사로 있었던 귀농운동본부에서 연락이 왔다.  귀농통문에 귀농기를 써 달라고. 그래서 썼지.

 

                                 강대골 봄비네 귀농기



열두 해가 지나고

  농부가 되겠다고 결심한 지 열두 해가 지났다.  처음엔 호미 한 자루만 있으면 어디든 가서 농사지으며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땅부터 시작해서 벼라 별게 다 필요하고 살림이 자꾸 는다.  이것이 있으니 저것도 있어야 하고 저것이 있으니 또 다른 것이 필요하다.  자립적으로 살 기반을 좀 더 마련하려니(빚도 좀 있다.) 돈이 필요하고 그래서 농산물을 팔려고 하니 인터넷과 컴퓨터가 필요하고 그래서 돈이 또 필요한 식이다.   이 시점에서 지나온 길을 한번 돌아본다.  


푸른누리 공동체에서

  1999년 12월에 푸른누리라는 수행공동체에 아이와 함께 들어갔다., 그곳에선 샴푸는 물론이고 비누도 안 썼는데 하루만 감지 않아도 머리가 가렵고 기름기가 묻어나는 나는 쌀뜨물로는 해결되지 않는 끈적임을 어찌할 수 없어 삭발을 했다.  매일 때수건으로 머리를 씻으니 편하고 상쾌했다.  백팔 번뇌중 머리카락에서 오는 번뇌 하나는 해결한 셈이었다. 2001년 푸른누리를 나와 아쉬웠던 것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삭발하기가 힘들어졌다는 것과 강대골에는 계곡이 없어 흐르는 물에 빨래하는 재미가 없는 것이었다.


만남

  푸른 누리에서는 새 이름을 짓는 사람이 많았다.  내 이름은 ‘하여’로 하고 딸의 이름은 ‘봄비’라고 지었다.  지금의 남편은 실상사 농장에 있다가 푸른 누리에서 잠깐 살게 되었는데 자신을 ‘왕자’라 불러 달라고 해서 모두들 ‘왕자님’이라고 했다.  왕자님은 농사일도 잘하고 밥도 잘하고 설거지도 잘 하고 키도 크고 특히 우스개 소리를 잘하는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살 곳 찾기

  푸른누리를 나오면서 봄비, 왕자, 하여 세 명은 뭉쳐서 함께 다니기 시작했다.  지도를 보고 살 지역을 정했는데 경북 영양이 그럴듯해 보였다.  백암산과 일월산이 있어 깊고 맑은 계곡이 많을 것 같고, 강원도가 아니니 그리 춥지도 않을 것 같고, 오지인 것 같아 땅 값도 비싸지 않을 것 같았다.  왕자님의 친구와 함께 친구의 트럭을 타고 빈 집을 알아보러 다녔다, 1박 2일 동안.  1박은 트럭위에서 했는데 그냥 포장을 위에 대충 치고 네 명이 함께 별을 보며 잤다.  집을 정하고 나서 친구는 자신이 가지고 다니던 물통과 모기장 등을 우리한테 주고 갔다. 

  영양에서 한 달을 살았다.  주로 담배 따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시간 날 때 마다 인근 지역을 돌아보았다.  예상과는 다르게 깊고 맑은 계곡을 잘 찾을 수 없었고 땅값도 별로 싸지 않았다.  백암산 자락에서 제법 깊은 계곡에 들어앉은 한 마을을 찾았는데 밭 이천평과 조금 손보아야 하는 집을 빌려주는 세가 1년에 백만원이라 하였다.

  ‘우리식으로 농사를 지어서 1년에 백만원을 벌어서 낼 수 있을까?’ 불가능해 보였다.  500평이라도 우리 땅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동 교차로에 평당 오천원으로 나온 땅이 있어 보러갔는데 이 땅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강대골이다.

  땅을 우리에게 판 사람은 부동산업자였는데 아랫동네에 작은 온천이 있어 온천 개발에 대한 희망으로 경매로 나온 땅을 샀다가 농지에 농사를 짓지 않으니 세금이 많이 나온다며 급하게 땅을 우리에게 넘겼다.  사실 우리는 살 돈이 되지 않아 오천원짜리 땅이 어떤가 하고 보러 간 것이었는데 돈이 반 밖에 없다고 하자 반만 주면 일단 땅을 넘길테니 돈은 천천히 갚으라 했다.  그렇게 떠맡다시피 삼천평을 얻었다.

  당시에 논이 천 오백평 밭이 천 오백평 정도였는데 논에는 버드나무가 우거져 있고 밭에는 잡목과 20~30년 된 낙엽송이 있었다.  그 부동산업자가 저 낙엽송으로 집을 짓고 살면 된다고 했을 때 ‘아~ 그래요.’ 하고 건성으로 들었는데 진짜 낙엽송을 베어 집을 짓고 불을 때면서 살고 있다. 

  북향이고 그럴듯한 계곡도 없지만 마을과 약간 떨어져 있고 산으로 둘러싸인 이 땅이 우리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바로 계약을 하고 부동산업자가 소개해 준 포크레인 기사가 첫 개간을 했다. 대충 나무만 베고 땅을 긁어준 정도였다. 


집짓기

  처음엔 1km 정도 떨어진 아랫동네에 방만 2칸을 빌려서 살았다.  그 때가 9월이었는데 11월에 겨울나기가 힘들다고 판단, 안동시내에 일단 방을 구해 돈도 벌면서 겨울을 나기로 하였다. 

  다음 해에 최초의 비닐하우스를 한 동 지었다.  아랫동네에 사시는 어르신 한 분이 올라 오셨기에 비닐하우스 안에 구들방을 놓을 수 있겠냐고 여쭈었더니 ‘있지.’하셨다.  그래서 가로 180cm에 세로 200cm 높이 120cm되는 구들방을 시험적으로 한번 놓아 보았다.  우선 세 식구가 누울 수는 있었기에 강대골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 다음 문제는 물이었다.  이번에도 그 어르신께서  강대골에 옛날부터 동네 사람들이 먹던 샘물이 있었다고 하시며 그 자리를 가리켜 주셨다.  그 곳을 파서 물이 모이게 한 다음 호스를 연결해 졸졸졸 나오는 물을 받아 날라 먹었는데 물맛은 최고였다.  그러면서 왕자님은 나무를 베고 밭을 정리했다.

  그러던 중 왕자님이 실상사 농장에서 알게 된 친구가 방문하였고 목수였던 그가 하루 짬을 내어 8자 8자 방 두 칸을 지을 때 드는 나무를 치목하는 방법과 집짓는 방법을 전수해 주고 갔다, 하루만에. 

  막상 방을 들이려 하니 무허가 집을 농지에 지을 때 6평 이하여야 한다고 해서 조금 넉넉한 집을 지으려면 비닐하우스를 지어 방을 들이는 게 좋을 것 같아 기둥과 지붕만 있는 목조는 마루를 놓아 정자로 쓰기로 하고 그 옆에 잇대어 비닐하우스를 지어 구들방을 놓았다.  우리는 아직까지 농사에 비닐을 쓰지 않는데 집은 비닐하우스다. 

  집을 지으며 중요하게 생각한 것 중 하나가 욕실이었는데 물솥을 욕실 안에 걸고 그 주변을 흙으로 채워 보온을 하니 따뜻한 실내 욕실에서 늘 따뜻한 물을 쓸 수 있게 되어 대성공이었다.  그 사이 샘물 호스에 1톤짜리 물통을 놓고 호스를 집까지 연결했는데 샘물 위치가 집 위치보다 꽤 높은 덕에 자연수압으로 집 안에서 맛있는 샘물을 마음껏 먹고 쓸 수 있게 되었다.  구들방에 놓는 실내 욕실은 어디서 들은 말이 있어 내가 고안하고 타일까지 직접 붙여 만들었는데 왕자님은 나랑 싸우고 성질이 나 있다가도 그 욕실에서 씻을 때면 나에게 고마운 생각이 든다고 한다.

  방은 두 개인데 안방을 처음 놓을 때 구들돌을 다 구하기가 힘들어 슬레이트를 썼다.  어디서 슬레이트를 쓸 수 있다는 말을 듣고 2~3장 포개어 그 위에 그냥 흙을 채웠는데 하고 나니 깨질까봐 조금 불안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안방에선 뛰지 마시오’한다.  다음으로 부엌방을 놓았는데 이번엔 40cm * 40cm 규격의 콘크리트 구들장을 만들어 썼다.  돌보다는 못하지만 꽤 쓸 만하다.

  강대골엔 전기가 없었고 전봇대가 없는 것이 자랑이었다.  푸른누리를 나와서 영양에 살 땐 있는 전기도 끊고 살았다, 전기가 자본의 촉수라면서.  그런데 3년 전에 어떤 계기로 전깃줄만 사다가 산으로 이어 전기를 놓게 되었다.  전기가 들어오니 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은 세탁기 없으면 못 살 것 같고 무선 인터넷까지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은 우리 가족에게는 아직 좀 위험할 것 같기도 하다, 너무 좋아해서.  부모님 댁에 오면 틈만 나면 컴퓨터와 텔레비전을 오간다, 경쟁적으로. 왕자님이 자긴 아니란다.  이제 시시해졌다나.  믿을 수 없다.


농사

  첫 개간을 하고 나서 첫 농사로 밀과 보리, 마늘을 심었다, 그 때가 10월이었기에.  그리고 다음 해 봄에 딱 심은 만큼 거두었다.  다음 해 봄에 심은 감자도 한 상자를 심어 한 상자가 났다.  그래서 우리는 웃으며 말했다. ‘우린 정말 뿌린 그대로 거두고 있어.’ 이후 삼년동안 모든 작물을 실험적으로 직파했다.

  밭둑에 사과, 배, 복숭아, 자두, 앵두, 모과, 호두, 감, 대추, 무화과, 매실 나무 등을 심었다.  복숭아는 4년째부터 벌레 안 먹은 것이 드물지만 나고 있고 자두, 앵두는 훌륭하다.  배도 6년째 되는 작년부터 나기 시작했다.  한 배나무에는 스무 개 이상 주렁주렁 달렸는데 감동적이었다.  사과, 모과, 호두, 감, 대추, 무화과, 매실 나무는 아직 소식이 없다.  나무가 아직 살아 잎을 피워 주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모든 작물과 나무에는 농약, 제초제는 물론이고 목초액도 안치고 자연 그대로 키운다.  무화과나무는 두 그루 심었는데 한 그루는 죽었고 또 한 그루는 올 봄이 와 봐야 안다.  나는 고향이 통영이라 무성한 무화과나무 잎 사이로 붉게 터지는 무화과 따먹는 재미를 안다.  ‘저 무화과는 내일이면 익겠구나 ’ 눈대중해 놓는 것은 비밀스런 즐거움이었다.  강대골에서도 물웅덩이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내려와 새콤달콤한 자두를 따 먹을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 중의 하나는 산딸기 따 먹기이다. 정말 행복하다. 봄비는 벚나무에 올라가 버찌 따 먹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첫 개간이후 해마다 꾸준히 논밭을 다시 정리하였다.  그냥 긁어 놓은 상태로 갈지 않고 유기물을 덮어 농사를 지으려고 해 보았는데 땅 속에 거름기가 별로 없는 상태에서 유기물을 덮기만 해서는 우리 먹을 것도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삼년 하다가 그 후부터 경운기로 갈고 로터리도 치고 고랑, 이랑도 내고 한다.    

  거름은 주로 산에서 낙엽과 부엽토를 긁고 산야초와 갈대, 잡목등을 베어 파쇄기로 썰어 장만하는데 남편은 이 일을 정말 즐긴다.  6년 동안 한 번도 농작물을 팔지 않고 땅 살리기와 기반 시설 만들기에 전념했다. (작년에 고추를 시범적으로 팔려고 했는데 한 근도 제대로 팔지 못했다.)  작년에 논밭에 자연수압으로 언제든지 물을 댈 수 있는 관개 시설을 하여 기반 시설은 대충 끝났다.

  지금의 경작 규모를 보면 논이 여덟 다랑이(600평 정도), 밭이 열네 다랑이(2000평 정도) 된다.  작년에 지은 것을 보면 고추를 3천 6백주 심어 250근 정도 했고 메주콩, 서리태, 콩나물콩, 고구마, 감자, 옥수수, 기타 텃밭 농사는 우리 먹을 것 정도 했다. 

  농사에 관한 한 나는 해 본 것 보다 해 보고 싶은 것이 많은 부족한 사람이다.  생활비등을 핑계로 왔다 갔다 하느라고 강대골에서 지낸 시간은 6년 중에 총 3년이 채 못 될 것 같다.  지금도 돈의 측면에서 보면 아슬아슬하다.  하지만 이제 어떻게든 강대골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림을 꾸리고 싶다. 그래서 회원을 모아 1년이나 한 달 단위로 회비를 받고  택배로 농산물을 보내는 가족회원제를 생각하고 있다.

  차로 15분 걸리는 거리에 부모님 댁이 있다.  재작년에 울산에서 시부모님 두 분이 안동으로 오셔서 텃밭 농사 지으며 사시는데 이곳은 햇볕이 좋은 남향이라 뭘 말리거나 모종 키우기에 좋아 우리가 왔다 갔다 할 때가 많다.  어머니도 농사일에 적극적이고 시골 생활에 아주 만족하신다.  장 담그기를 비롯해 여러 가지 먹을거리 장만을 잘 하셔서 배울 것이 아주 많다.  그리고 식혜를 만들어도 꼭 엿질금부터, 막걸리를 담아도 누룩부터 만드시기 때문에 최고급이다.  올 겨울엔 농사지은 수수 한 되로 수수조청을 고으셨는데 수수식혜가 잘 삭으면 고으는 동안 안 저어줘도 밑이 타지 않는다는 게 신기했다.  내년엔 수수를 좀 더 해서 나도 한번 해 봐야겠다. 

  남편은 거의 모든 시골일이 처음이었지만 조금씩 몸으로 부딪쳐 경험하며 하나하나 배워 나갔다.  기계톱으로 나무베어 땔감하기. 치목해서 집짓기. 개간하기. 경운기로 갈고 로터리 치기. 논농사, 낙엽과 부엽토 긁어서 거름하기, 동물 돌보기 등.  물론 그 전에 실상사 귀농학교를 나와 실상사 농장에서도 몇 개월 살았고 푸른누리에서도 몇 개월 살았지만 시골 생활에서 해야 할 일들을 총체적으로 경험하는 일은 혼자 농사지으면서 하게 되었기 때문에 대단하게 생각한다.  스스로는 이런 일들을 해 나가면서 자신이 깨달았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시작했는데 다른 이들은 그가 해낸 일들은 대단하게 생각했지만 깨달았다고 하는 데는 거부감을 가지며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나도 인정하지 않았는데 어떨 땐 ‘진짜 깨달았나?’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교육

푸른누리에 있을 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난 봄비 교육보다 나 자신이 올바로 배워서 스스로 만족할만한 사람이 되는데 더 관심이 있어요. 부모가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산다면 자식이 보고 배우지 않을까요.’ 근데 지금은 좀 다르다.  나보다 봄비가 훨씬 훌륭하기 때문이다.  가끔 봄비가 하는 일이 나의 고정된 습에 맞지 않아 짜증이 날 때가 있고 단지 엄마라는 이유로 아이에게 부당하게 할 때가 있다.  의논하면 되는데 말이다.  아이들은 소중한 친구다. 

  봄비가 초등학교 들어갈 나이가 되었을 때 보내고 싶지 않아서 신경 쓰지 않았다.  입학식에 안 갔더니 다음날 학교에서 연락이 왔기에 봄비에게 ‘한번 가볼래?’하니 가본다고 해서 다음날부터 학교에 가게 되었다. 친구들도 있고 해서 다니긴 다녔는데 글자를 전혀 몰랐던 봄비는 글자를 다 알고 들어온다고 생각하고 만든 1학년 국어 과정을 힘들어했다.  안 다닌다고 할 줄 알았는데 1학년 땐 그런대로 잘 다니고 글자도 웬만큼 알게 되었다.  나도 ‘한 학년이 다섯 여섯명 되는 시골학교 정도는 다녀도 되겠지.’ ‘친구들도 있어서 심심하지 않으니까.’ ‘혼자서 책을 보니 내가 좀 편하네.’등의 생각을 했다.  단 가고 싶지 않으면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우리의 방침이다.  2학년 때는 총 출석일의 3분의 1을 겨우 갔고 3학년, 4학년 땐 아플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간 편이다.  시골학교라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 등은 덜하지만 그래도 학교는 학교인 것 같다.

아이들이 자기만 따돌리는 것 같다고 속상해 하기도 하고 나가기 싫은 수학 경시 대회 나가라고 엄청 어려운 수학 문제집을 주면서 과도한 숙제를 내서 스트레스 받기도 했다.  그래도 학교는 간단다.  시골학교이고 전교생이 40명 안팎이라 전교생이 함께 수학여행도 가고 ‘도서 벽지 학교 초청 서울 문화 체험’같은 기회로 에버랜드도 공짜로 가고 하니 그런 재미를 포기하기가 힘든 모양이다.

  남편은 농부가 최고의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이들도 나중에 농사짓기를 바란다.  그의 이론은 이렇다.  ‘모든 부모가 최고로 좋은 것을 물려주고 싶어 한다.  변호사나 의사들이 자신의 아이가 자신의 직업이나 돈과 명예가 보장되는 어떤 직업을 가지기를 원하는 것처럼 나도 내 아이들이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직업인 농부로 살기 를 바란다. 농사와 자연에 모든 것이 들어있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나도 최고의 직업이 농부라고 생각하지만 아이들은 그냥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길 바란다.  물론 내 개인적인 바람은 함께 농사짓고 옷도 만들고 요리도 하며 사는 것이다.  


의료

  우리 집은 총 보험료가 많다.  내가 조금이나마 돈을 벌 때 보험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이 한번 바뀌어서 넣기 시작하니 끊기가 참 힘들다.  국민의료보험공단에 내는 것이 4만원이고 기타 사보험이11만원 정도 해서 총 15만원 정도 된다.  이렇게 쓰고 보니 많다는 게 더 실감난다.  

  시골에 살아도 병원 신세를 가끔 진다.  남편은 벌에 쏘여서 퉁퉁 부으면 사혈을 하는 정도인데도 안동에 와서지난 7년간 병원에 세 번 갔고 봄비도 천식성 폐렴으로 세 번 입원하였다.  나도 실험정신이 살아 있다고 자부하는데 남편은 한 수 위라 언젠가 한번은 살구씨를 먹고 토사곽란을 하더니 얼마 전엔 또 피마자 씨를 먹고 토사곽란이 나서 밤새도록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더니 점점 힘이 떨어진다며 밤중에 119를 타고 병원에 간 적이 있다.  해독제가 있는 줄 알고 갔는데 별 조처는 없었다고 한다. 3일 동안 아무것도 못 먹고 겨우 일어나 하는 말이 한번 먹어볼 만 하단다.  몸이 개운해졌다나.  그리고 봄엔 논밭 갈고 로터리 치느라 경운기 매연, 여름엔 풀, 잡목 베어 거름 만드느라 파쇄기 매연, 겨울엔 나무하느라 기계톱 매연 마신다.  기계없이 농사지으면서 자급하려고 지금 노력하고 있다. 

  5년 전엔 공단에 내는 보험료도 아깝게 생각했었는데......  그새 지키고 싶은 게 많아졌나보다.     


하고 싶은 일 

  나는 오래 살고 싶다, 해 보고 싶은 일은 많은데 그것들을 천천히 이루고 싶어서 그렇다.  우선 가족 회원제를 하면서 건강한 먹을거리를 잘 장만하고 싶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닭장도 좀 더 늘리고 닭 울타리를 밭에 쳐서 ‘닭농 옥수수’를 재배해 보고도 싶고  산딸기를 아아치형으로 올려도 보고 싶고 소주 고리를 사서 증류식 소주도 괴어 보고 싶고 튀밥기계를 사서 튀밥도 튀기고 싶을 때 튀기고 싶다.  좀 더 여유가 되면 저장실이 있는 아주 편리하고 생태적인 집을 짓고 천연염색해서 옷도 지어 입으며 살고 싶다. 

  자립적으로 사는 일은 쉽지 않은데 자립적이란 것도 때에 따라,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욕망 조절하기’ 일 것이다.  얼마 전에 봄비가 보석을 갖고 싶다고 하였다.  그래서 ‘엄마는 그런 쓸 데 없는 걸 사는 데 쓸 돈을 버느라고 인생을 허비하기 싫어서 강대골로 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소주 고리와 보석 중 어느 것이 더 쓸 데 없는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일을 계획할 땐 자립적인 삶을 꾸려가는 데 그 일이 정말 필요한 일인지 아닌지 늘 잘 살펴보아야 한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삶’이면 좋겠지만 대신 가끔 돌아보며 가지치기 하는 것으로 자족한다.